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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의 60%가 투자한 알바니아 금융 사기

희대의 사기꾼⑤ 피라미드 사기로 내전까지 이어져

  • (2020-11-06 10:03)

1997년 폰지 사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국민 대부분이 재산을 잃어버린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반년 넘게 유혈사태로 이어져 내전이 일어난 곳. 바로 유럽의 작은 나라(우리나라의 1/8) 알바니아다.


자본주의 경험이 없던 알바니아
한 국가의 국민 약 60%가 폰지 사기에 휘말려 재산 대부분을 손실한 이 희대의 사건이 과연 어떻게 일어나게 됐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1990년대 초 알바니아의 국가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냉전 시기에도 서방권과 적대관계가 아니었던 인접 유고슬라비아, 적대관계였더라도 미국, 서유럽 국가들과 기본적인 교류는 하던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는 달리, 알바니아는 스탈린주의에 철저히 경도된 엔베르 호자가 장기 집권하며 어떠한 국가와도 일절 교류하지 않는 극단적인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타 동구권 국가들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했지만, 알바니아는 꿋꿋이 철저한 중앙통제 경제정책을 취하며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절 거부했다.

▷ 집권 정치인들의 사진을 불태우는 알바니아 국민

그 결과 알바니아는 동구권이 붕괴되던 1989년 동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더라도 최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었다.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알바니아도 1991년 동구권에서 마지막으로 47년간 이어졌던 공산독재를 종식시키기는 했지만, 빈곤이 극심하고 자본주의 경제체제 경험이 전무해 체제전환 과정에서 루마니아, 불가리아보다도 어려움을 훨씬 더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경제 전문가가 폰지 사기꾼
앞서 언급한대로 알바니아는 당시 자본주의 경험이 없었다. 이런 취약점을 파고든 집단은 다름아닌 현지 마피아와 결탁한 피라미드 회사들이었다. 1992년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총선에서 패하고 심장 전문의 출신 살리 베리샤(Sali Berisha)가 이끄는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는데, 이때부터 알바니아 정부와 피라미드 회사간 유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부 내에 경제 전문가가 하나도 없었기에 외부 전문가를 불러 의지했는데, 그 전문가라는 사람들 중 폰지 사기꾼인 하이딘 세이디야(Hajdin Sejdia)가 있었다.

세이디야를 포함한 사기꾼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러 피라미드 회사들을 설립했다. Sudja, Beno, Bashkimi 등 23개 회사들은 고수익을 보장해준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50여 년 가까이 폐쇄적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알바니아에선 일반 대중은 물론 정부 관료들까지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경제상식을 몰랐다. 더군다나 당시 알바니아가 3년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물가상승률도 높았기에 국민들은 고수익이라는 말에 속아 있는 돈, 없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 피라미드 회사들에 투자했다.

이들 피라미드 회사들은 주로 무기 밀매와 고객들의 투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고, 처음엔 고객들에게 약속한 대로 고수익률 배당금을 지급해주었다. 게다가 이 회사들은 알바니아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승인을 받았고 정부 관료들과도 유착했기 때문에 미래의 위험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다. 1997년 초에는 전체 인구 330만 명 중 무려 60%가 넘는 200만 명이 피라미드 회사에 투자하는 실정이었다.


반짝했던 거품경제
이들의 사기 초기에는 많은 돈이 융통됐기 때문에 경제가 확 살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금융사기가 벌어지기 직전의 알바니아는 경제상황이 매우 암울했고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라미드 사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1993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률은 플러스로 돌아섰고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연평균 8.8%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러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국민들의 소득수준도 급속히 불어나며 이전보다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동유럽에서 체제전환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나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거품경제였다. 불법무기 밀매와 고객 투자유치만으로 회사들이 정상적인 수익을 낼리 만무했다. 이들 피라미드 회사들은 이웃나라인 유고슬라비아가 내전과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무기를 밀거래하면서 일단 고객들에게 수익금을 줄 수 있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1996년 경제성장률이 7.1%로 둔화되며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1997년 1월 8일을 기점으로 피라미드 회사들이 연쇄도산을 하며 사태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정부가 인정한 합법 피라미드?
당시 알바니아의 정치인들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자신의 정치적 선거 전략으로 활용해 지지율 상승으로 이끌고자 피라미드 회사의 상징을 선거 포스터로 사용했다. 베리샤 대통령과 집권당은 단기간에 고금리를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이와 같은 피라미드식 투자 예금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장려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피라미드 회사들이 불법이 아니라 정부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투자유치가 된 것이다.

국민들 중 일부만 폰지사기에 연루되었어도 큰 사회문제가 되었을 텐데, 알바니아에선 국민의 과반수가 연관되어 전재산을 잃어버렸기에 그냥 ‘큰 문제’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개인만이 아니라 호텔, 공장, 연료회사 등 경제의 핵심이 되는 일반 사기업들도 피라미드 회사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기에 단 며칠 만에 알바니아 전체 경제가 마비되고 말았다.
▷ 샬리 베리샤 전 알바니아 대통령

또, 베리샤 대통령과 집권당이 이들 회사들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밝혀지자 200만 명의 피해자들 중 70만 명 이상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게 된다. 1997년 1월 16일, 남부지방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19일에는 수도 티라나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24일에는 본격적으로 폭력사태로 시위가 격화되어 내무부를 제외한 수도의 정부 부처들이 모두 시위대에게 점령,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악화된 시위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3월 다국적 군의 개입으로 사태가 안정됐다.


참혹한 교육
이 사건으로 알바니아는 피라미드 회사가 은행에 예치한 돈을 환수해 투자자에게 배분했지만 2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고, 전국에서 민간인, 경찰, 군인을 포함한 3,800여 명이 희생됐다. 그리고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1996년 1,046달러에서 749달러로 약 10년 전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1997년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10.1%를 기록했다.
▷ 내전이 일어나자 알바니아에 거주 중이던 자국민을 철수시키는 미군

내전까지 이어진 국가적 피라미드 사기 사건은 자본주의 경험이 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감독 없이 어설프게 체제 전환을 시도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알바니아는 그 결과를 몸으로 겪으며, 뼈저리게 배운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인접한 연방국가들과는 달리 경제문제가 주 원인이었기에 알바니아는 상대적으로 사태를 빨리 진정시켰고, 이후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연평균 9.2%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국가적 금융사기 사건의 후유증을 넘기고 정상궤도를 밟게 됐다.

<자료출처: 나무위키, 레몬마켓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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