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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느린 자들의 순례, 바셋 하운드와 함께 걷다

  • 권영오 기자
  • 기사 입력 : 2025-06-27 00: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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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의 푸른 초원에서 벨기에 아르덴 숲까지

<개들의 고향 – 39>




축 늘어진 귀, 땅에 닿을 듯 짧은 다리, 그리고 세상 모든 이야기를 담은 듯 깊게 팬 주름진 얼굴. 하지만 그 처진 눈매 속에는 한없이 다정하고 고요한 지혜가 서려 있다. ‘허시파피’로 우리에게 친숙한 바셋 하운드. 그들은 단순히 육중한 몸을 지닌 사냥개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시간의 파편, 잊혀진 풍경, 사라진 냄새들을 끈질기게 붙잡는 낮고 느린 순례자일지도 모른다.

바셋 하운드가 걸어온 길은 프랑스 북부의 풍요로운 노르망디 평원에서 시작하여, 벨기에의 깊은 아르덴 숲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낮고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태초의 후각, 평화의 서곡
바셋 하운드의 이름 ‘바셋(Basset)’은 프랑스어로 ‘낮다’는 뜻이다. 짧은 다리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16세기부터 프랑스의 수도원들, 특히 노르망디와 아르투아 같은 북부 지역의 수도사들에 의해 토끼나 꿩 같은 작은 사냥감을 쫓는 데 특화된 품종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블러드 하운드 같은 대형 하운드와 짧은 다리의 바셋 타입 개들을 교배하며 그 독특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여느 개와 마찬가지로 특정 도시 하나를 바셋 하운드의 ‘탄생지’로 지목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활약했던 무대는 분명 노르망디의 넓고 평화로운 숲과 들판이었다.

노르망디의 구릉지대와 무성한 숲은 바셋 하운드가 그들의 뛰어난 후각을 발휘하며 사냥감을 추적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들의 짧은 다리는 덤불 속을 헤치고 다니며 사냥감을 몰아내는 데 유리했고, 축 늘어진 긴 귀는 지면의 냄새를 모아 코로 전달하는 놀라운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노르망디의 자연이 빚어낸, 느리지만 집요한 사냥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노르망디를 걷다 보면,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 떼와 양 떼의 모습이 바셋 하운드의 느긋한 발걸음과 겹쳐지는 듯하다. 바쁜 도시의 삶에 지친 현대인들은 이곳의 여유로운 풍경 속에서 비로소 숨통이 트일지도 모르겠다. 바셋 하운드가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격을 지니게 된 것도, 아마 이곳 노르망디의 풍요롭고 고요한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노르망디는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미식의 보고다. 풍부한 농산물과 신선한 해산물이 넘쳐나는 이곳에서는 누구나 바셋 하운드처럼 느긋하게 앉아 노르망디의 맛에 탐닉해도 무방하다. 가장 먼저 여행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사과주 ‘시드르(Cidre)’와 사과 브랜디 ‘칼바도스(Calvados)’다.

양조장을 방문해 갓 짜낸 신선한 시드르를 맛보고, 오크통에서 숙성된 깊은 풍미의 칼바도스를 한 모금 넘기면,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사과 향이 입안 가득 번져 나간다. 바셋 하운드의 침 흘리는 모습처럼, 노르망디의 산해진미에는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노르망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망베르(Camembert) 치즈의 탄생지다. 몽글몽글한 우유가 숙성을 거쳐 부드러운 속살과 흰 곰팡이 옷을 입는 과정은 마치 연금술 같다. 갓 만든 카망베르 치즈를 바게트에 발라 한 입 베어 물면,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가 예술적인 조화를 이루며 혀끝을 감쌀 것이다. 겉모습은 투박하지만 속은 깊은 맛으로 가득 찬 카망베르 치즈는 왠지 모르게 바셋 하운드의 첫인상과 닮았다.

해안 지역에는 신선한 해산물이 풍성하며 몽 생 미셸 주변의 드넓은 염습지에서 풀을 뜯고 자란 양고기 ‘프레 살레(Pr. Sal.)’는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풀 덕분에 독특하고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맛보는 굴과 홍합 요리, 그리고 바다 내음 가득한 해산물 플래터는 노르망디의 자연이 준 선물이다.


고딕의 빛과 중세의 그림자, 샤르트르
노르망디의 여유로움을 뒤로하고, 바셋 하운드의 역사적 흔적을 더듬어 프랑스 중북부의 샤르트르로 향한다. 아침 햇빛이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부드럽게 깃든다. 수세기 전 장인의 혼을 머금은 유리 조각이 붉고 파란 빛으로 사색의 문을 열어준다. 웅장한 고딕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샤르트르 대성당은 그 자체로 역사의 증언자다.



중세 시대 귀족들의 사냥 장면을 담은 수많은 회화와 태피스트리에서 긴 귀와 짧은 다리로 천천히 뒤따르는 사냥개의 윤곽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바셋 하운드의 조상 격인 하운드일 것이다. 이 대성당의 돌과 유리 속에는, 당시 사냥 문화와 그 속에서 인간과 함께했던 개들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조금 여유가 있다면 대성당 아래 ‘중세 채색 필사본 공방’을 찾아가, 섬세한 붓질로 그려진 중세 시대의 삽화를 감상해도 좋다. 귀족들의 사냥 장면이 담긴 그림 속, 낮은 자세로 냄새를 쫓는 사냥개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한 바셋 하운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종이 위에 그려진 사냥꾼의 그림자는 수세기를 건너 바셋 하운드가 단순한 사냥 도구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든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샤르트르의 미식 또한 놓칠 수 없다. 든든한 감자 크루통이 든 양파수프로 허기를 달래고, 와인 한 모금과 함께 산골 치즈 타르트를 맛보자. 노천 카페에 앉아 시간이 멈춘 듯한 대성당의 풍경을 음미하며, 바셋 하운드처럼 느긋하게 도시의 숨결을 들이마셔 볼 것.

성당 옆 야외 마켓에서는 샤르트르 치즈, 건과일,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을 구경하거나 현지인들의 활기 넘치는 삶을 엿볼 수 있다. 도시 외곽의 사냥 테마 박물관에서는 중세 하운드와 유물, 관련 스니펫 영상들을 통해 바셋 하운드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밤에는 고딕 성당의 잔잔한 음향이 도시 전체를 울리는 무대음악회를 감상하면서 바셋 하운드의 ‘존재 이전의 영혼’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바람과 숲의 기억, 기도의 숲길

샤르트르를 떠나 북동쪽으로 달려가면 벨기에의 아르덴 숲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생위베르에 닿는다. 이곳은 사냥꾼에서 수도자로 거듭난 ‘생 위베르’ 성인의 이름을 딴 작은 숲의 도시다. 중세 시대 사냥개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던 생 위베르의 전설은 이 도시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깊은 숲길 어귀, 웅장한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빛바랜 성당 입구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생위베르에서는 매년 11월 초에 장엄한 ‘사냥개 축복식’이 열린다. 마을 광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냥개와 그들의 주인들이 조용히 모여들고, 신부는 정성스럽게 각자의 하운드를 축복한다. “이 개가 추적하듯 우리의 영혼도 길을 잃지 않게 하소서” 고요한 기도 속에 울리는 방울소리가 짧은 다리로 조용히 땅 위를 옮겨 가는 바셋 하운드의 움직임과 교차된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인간과 개 사이의 눈빛은 언어보다 깊은 교감을 보여준다. 신부가 성수를 뿌린 뒤 서로를 껴안는 듯한 장면 속에는, ‘함께 기억한다’는 은밀한 맹세가 있다.

생위베르 수플레 치즈와 깊은 풍미의 벨기에 흑맥주(트라피스트 스타일)는 환상의 조합이다. 야생 버섯 포타주는 숲 향이 짙게 배어든 따뜻한 수프이며, 숲속에서 바로 채취한 꿀과 견과류 소스가 곁들여진 플래터는 자연의 맛을 좇는 특별한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생위베르에서는 ‘게임과 사냥 박물관’ 견학을 통해 사냥과 사냥개의 역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숲길 후각 추적 체험 워크숍에 참여하여 바셋이나 저먼 셰퍼드 같은 사냥개와 함께 숲을 거닐며 후각의 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다. 수도사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바람을 호흡하는 ‘숲속 명상 걷기’는 바셋 하운드처럼 땅에 낮게 엎드려 자연의 소리를 듣는 듯한 평화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사진: 게티이미지프로>

 
권영오 기자mknews@m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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