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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애에 취하지 말고, 치욕에도 무너지지 말라

  • 권영오 기자
  • 기사 입력 : 2026-01-23 09: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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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아낄 줄 알아야 세상을 가질 수 있다

<진리를 찾아서…>

▷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도덕경』 제13장(第13章)

寵辱若驚
(총욕약경)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놀란 것처럼 하라.

貴大患若身
(귀대환약신)
큰 환란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놀란 것처럼 하라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寵爲下
(총위하)
총애란 본시 욕되게 마련이니

得之若驚,失之若驚
(득지약경, 실지약경)
얻어도 놀란 듯이, 잃어도 놀란 듯이 하라는 말이다.

是謂寵辱若驚
(시위총욕약경)
이것을 일러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놀란 듯이 하라는 말이다. 

何謂貴大患若身?
(하위귀대환약신)
큰 환란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吾所以有大患者,爲吾有身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내게 큰 환란이 있는 것은 내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及吾無身,吾有何患?
(급오무신, 오유하환)
만약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른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故貴以身爲天下,若可寄天下
(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그러므로 내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수 있다. 

愛以身爲天下,若可託天下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
내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총애와 치욕을 같은 범주에 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총애를 축복으로, 치욕을 불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노자의 눈에는 둘 다 인간을 뒤흔드는 동일한 충격일 뿐이다. 총애를 받으면 잃을까 두렵고, 치욕을 당하면 회복하지 못할까 두렵다. 방향만 다를 뿐,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힘은 동일하다. 다만 총애도 치욕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순환하고 반복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총애에 지나치게 익숙한 사회다. 성공한 사람은 끊임없이 조명받고, 실패한 사람은 속절없이 잊힌다. 문제는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데 있다. 각종 소셜 미디어는 누군가를 순식간에 스타로 만들고, 같은 속도로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총애와 인기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유지해야 할 부담이 된다.

노자의 ‘놀란 것처럼 하라’는 말은 예기치 못한 외부 자극에도 마음의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총애를 받는 순간 자신을 잃는다. 지금 국가적인 골칫거리로 떠오른 쿠팡이 그렇고, 끝내 한국 총판 자리를 내준 호카가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존재가 규정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좋아요’의 숫자로 자신을 평가한다. 조회 수가 줄어들면 불안해지고, 반응이 미미하면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총애를 받을 때 이미 총애가 사라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총애는 어쩌다 찾아온 손님 같은 것이다. 손님은 반드시 자신의 갈 길로 가게 돼 있다. 

치욕 또한 마찬가지다. 한 번의 실패, 한 번의 실언,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평생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극도로 위축된다.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는 도전 자체를 위축시키고, 그 결과 사회 전체의 활력은 빠르게 고갈된다. 그러나 총애와 마찬가지로 치욕 또한 손님 같은 것이다. 영원히 머물지 않고 잠시 잠깐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떠나가는 길손 같은 것이므로 치욕을 받았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진 듯이 낙담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큰 환란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는 말은 존재의 원천을 겨냥한다. 인간이 근심과 걱정에 시달리는 이유는 몸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몸이 있기에 병들고, 늙고, 상하고, 죽는다. 그러나 노자의 이 말은 단순한 허무주의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근심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몸을 관리 대상이자 전시 대상으로 취급한다. 건강은 유지해야 할 자산이 되었고, 외모는 경쟁력이 되었다. 몸은 나 자신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해야 할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몸은 나를 보호하는 집이 아니라, 평가받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노자가 말한 ‘큰 환란, 즉 근심’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이 모든 두려움의 뿌리는 나라는 존재를 외부 조건에 의존시켰기 때문이다. 직함, 연봉, 소속, 팔로워 수, 평판. 이것들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는 순간, 그것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는 ‘대환(大患)’이 된다.

노자는 묻는다. ‘어찌하여 큰 환란이 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한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세상보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 누가 나를 소중히 여기겠는가. 이는 세상의 평가보다 자기 존재를 우선하라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번아웃에 시달린다. 과도한 업무, 끝없는 경쟁, 비교의 일상화. 그러나 그 근본에는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 있다. 승급, 계약, 관계, 평판.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소진시킨다. 몸이 신호를 보내도 무시하고, 마음이 무너져도 참고 견딘다. 그렇게 얻은 총애는 오래가지 않고, 그렇게 피한 치욕은 언젠가 더 큰 형태로 돌아온다.

노자는 명확히 말한다. 자기 몸을 세상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만이 세상을 맡을 수 있다고. 이는 지도자의 덕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삶에 대한 지침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소모시키면서까지 얻은 성공은 결국 자신을 파괴한다. 몸과 마음을 지키지 못한 성취는 공허하다.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 누군가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화려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의 불안과 공포, 유지해야 할 부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총애를 받는 자는 언제든 치욕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한 지혜는 단순하다. 나를 지키는 사람이 세상을 지킬 수 있고, 나를 잃지 않는 사람이 성공을 감당할 수 있다. 총애에 취하지 말고, 치욕에 무너지지 말라는 말은 감정을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다. 감정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지금 당신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잃으면 나는 끝이라고 느끼는 것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순간 이미 그것은 ‘대환’이 되어 있다. 노자는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나 자신보다 앞서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성공은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 총애를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치욕을 당해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며 세상과 함께 갈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놀라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의 시작이다.

 

권영오 기자mknews@m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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