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핵심의약품법이 바꾸는 글로벌 공급망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식약정보>

팬데믹 이후 글로벌 산업 질서는 ‘효율’보다 ‘안정’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와 함께 의약품이 국가 안보 차원의 전략 자산으로 재분류되면서 각국은 공급망 자립 정책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최근 유럽연합(EU)이 핵심의약품법(CMA) 제정에 잠정 합의한 것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여기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 중인 의약품 관세 강화와 자국 생산 확대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글로벌 의약품 공급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원가 절감과 생산 효율성을 중심으로 중국·인도 중심의 글로벌 분업 구조가 형성됐다면, 이제는 공급 안정성과 국가별 생산 거점 확보가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EU 핵심의약품법이 단순한 보건 정책을 넘어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무역 질서와 조달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한국 기업들 역시 유럽 진출 전략, CDMO 생산 기지 운영, 원료의약품(API) 공급망 전략 등을 전면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EU, 핵심의약품 특정 국가 의존도 줄인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가 발간한 ‘EU 핵심의약품법 제정이 미칠 영향’에 따르면 EU 이사회와 유럽의회는 5월 12일 핵심의약품법안에 잠정 합의했다.
핵심의약품법은 항생제, 인슐린, 진통제 등 필수 의약품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유럽 내 공급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추진된 제도다. 특히 EU는 핵심의약품 및 원료의약품 생산 역량을 유럽 내부에서 확대하고,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사실 EU의 문제의식은 팬데믹 기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코로나19 당시 유럽은 중국과 인도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의약품 공급망이 흔들리며 항생제와 해열제 부족 사태를 겪었다. 원료의약품 공급이 중단되거나 물류가 차질을 빚자 병원 현장에서 실제 의약품 수급 불안이 발생했고, 이는 “의약품 공급망도 에너지 안보처럼 국가 전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현재 글로벌 원료의약품 시장은 중국과 인도가 압도적인 생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아시아 생산 기지 중심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돼 왔지만, 지정학적 갈등과 공급망 리스크가 커지면서 유럽과 미국은 ‘리쇼어링(Reshoring)’ 또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을 강화하는 추세다.
EU 핵심의약품법은 바로 이러한 공급망 재편 흐름을 제도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법안은 단순히 생산 장려 수준을 넘어 공공조달 기준 자체를 바꾸는 데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최저가 입찰에서 공급 안정성으로 전환
그동안 유럽 공공 의약품 입찰은 가격 중심 구조가 강했다.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기업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중국·인도 생산 기반 기업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이번 핵심의약품법은 공공조달 과정에서 ‘회복력 관련 요건(resilience-related requirements)’ 적용을 의무화했다. 이는 단순히 가격만이 아니라 공급 안정성, 생산 다변화, 비상 대응 역량 등이 새로운 평가 기준으로 반영된다는 의미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EU 우선(EU preference)’ 접근 방식이다. 법안은 핵심의약품과 활성 성분의 유럽 내 생산을 장려하고 비EU 국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발주처가 EU 우선 기준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사실상 유럽 내 생산 거점을 확보한 기업들이 조달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제품이라도 유럽 현지 생산 여부가 경쟁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또한 EU 회원국 간 공동조달 체계도 강화된다.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핵심의약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조달 요청 참여 기준도 기존 9개국에서 5개국으로 완화했다. 이는 향후 유럽 차원의 공동 구매 규모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비상 재고 확보 조치 역시 눈에 띈다. EU는 회원국 간 비상 재고 데이터 공유와 자발적 재분배 체계를 강화해 공급 위기 상황에서 공동 대응 역량을 높이기로 했다.
결국 이번 법안은 단순한 의약품 부족 대응을 넘어, 유럽이 독자적인 의약품 공급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는 평가다.
미국도 ‘자국 생산’ 강화
EU의 움직임과 함께 글로벌 공급망 변화의 또 다른 축은 미국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제조업 부흥과 공급망 안보 강화를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의약품 분야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하기 위한 관세 정책과 인센티브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특히 원료의약품과 필수 의약품 생산시설의 미국 복귀를 강조하면서, 국가안보와 보건안보를 연계하는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EU 정책과 방향성은 유사하지만 접근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EU는 공동조달과 공공조달 기준 개편을 통해 유럽 내 생산 유인을 강화하는 방식이라면, 미국은 관세, 보조금, 세제 혜택 등을 활용해 직접적으로 생산시설 이전을 압박하는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이 같은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글로벌 제약기업들의 생산 전략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아시아 생산기지에서 미국과 유럽 시장을 동시에 대응하는 구조가 가능했다면, 앞으로는 미국용·유럽용 생산거점을 별도로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확대될 수 있다.
특히 의약품은 품목허가, GMP 인증, 공급계약 구조가 국가별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생산 거점 변경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공급망 재편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 제약·바이오업계 입장에서는 이번 변화가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동시에 나온다.
우선 리스크 측면에서는 유럽 현지 생산 여부가 중요해지면서 국내 생산 중심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특히 원료의약품을 중국이나 인도에 의존하는 구조라면 공급망 평가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바이오협회 역시 EU에 진출했거나 진출을 준비 중인 기업들이 자사 제품이 EU 핵심의약품 목록에 포함되는지, 공공조달 기준상 유·불리를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반면 기회 요인도 존재한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들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산 인프라와 높은 품질관리 수준을 갖춘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바이오의약품 CDMO 분야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한국 생산시설 활용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에게도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생산능력 확대만이 아니다. 어느 국가와 공급망을 연결하고, 어디에 생산 거점을 두며, 어떤 시장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가 핵심 경쟁력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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