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사설> 신선식품 시대에 묵은 방판법이라니

  • 기사 입력 : 2026-08-20 14:59:09
  • 수정 시간 : 2026-08-20 15:07:01
  • x

어떠한 경우에도 법이 현실을 앞서갈 수는 없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게 마련이고, 특히 대한민국 같은 격동적인 사회는 비록 법이 현실을 규율한다고 하지만 적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법을 만들 당시에는 합리적이었던 규제도 산업과 소비문화가 달라지면 현실과 충돌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규제의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현실에 맞게 규제의 방법을 바꾸는 일이다. 다단계판매를 규율하는 방문판매법도 이제 이런 관점에서 들여다볼 때가 됐다.

과거 다단계판매의 주력 상품은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생활용품 등이었다. 현행 제도가 만들어질 당시 냉장·냉동식품은 물론 생고기와 과일 같은 신선식품까지 다단계판매를 통해 일상적으로 거래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온라인 주문은 일상이 됐고 새벽배송과 당일배송이 보편화되면서 유통업체들은 생고기와 수산물, 과일, 반찬까지 전국에 판매한다. 다단계판매업계에서도 육류와 수산물, 김치, 간편식 등 먹거리 상품을 취급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문제는 법이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방문판매법상 다단계판매원의 청약철회 기간은 원칙적으로 계약 체결일로부터 3개월이다. 소비자와 판매원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그 취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3개월이라는 기간을 상품의 특성과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적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생고기와 과일의 상품 가치는 시간에 따라 급격하게 떨어진다. 소비기한이 며칠 또는 몇 주에 불과한 상품을 석 달 뒤에도 반품할 수 있도록 한다면 판매업체가 감당해야 할 위험은 일반 생활용품과 비교하기 어렵다. 반품된 신선식품은 다시 판매할 수도 없다.

실제로 농축수산물 등을 판매했던 노블제이는 신선식품의 특성을 고려한 청약철회 적용이 가능한지를 문의했지만 상품의 종류와 관계없이 3개월을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회신을 받은 바 있다. 반품된 상품을 재판매하지 못하고 소외계층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손실을 감수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규제는 신선식품을 판매하려는 업체에 사실상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법 제정 당시 예상하지 못했던 상품과 거래방식이 등장했다면 법을 현실에 맞게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 당장 법률 개정이 어렵다면 시행령이나 고시, 유권해석 등을 통해서라도 합리적으로 운영할 여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소비기한, 상품 가치의 감소 속도, 재판매 가능성 등을 고려해 청약철회 기준을 세분화하고 그 내용을 소비자에게 명확하게 고지하도록 하는 방법도 검토할 수 있다.

이것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좀 더 정교하게 규제하는 일이다. 소비자 보호라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상품과 거래방식의 차이를 인정하고, 기업까지 보호하는 일인 것이다. 30년 전의 유통환경과 오늘의 유통환경은 다르다. 법이 시대의 변화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변화를 목도하고도 과거의 잣대만 고집한다면 직무유기에 가까워진다.

생고기와 화장품을 똑같은 3개월의 잣대로 규율하는 것은 소비자 보호라기보다는 기업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소비문화가 달라졌다면 법도 달라져야 한다. 적어도 현실에 맞게 움직일 수 있는 유연성은 허용해야 한다.

 

※ 저작권자 ⓒ 한국마케팅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