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후> 84억 원이 된 한때 세계 1위 에이본
한때 세계 직접판매업계를 호령했던 에이본의 북미사업에 매겨진 가격은 6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4억 원이다. LG생활건강 북미법인은 지난 8월 24일 자회사 더 에이본 컴퍼니의 지분 100%를 스트랫포드 월드와이드에 매각하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정확한 매각대금은 거래 종결 시점에 확정될 예정이지만, 공시된 처분금액만 놓고 보면 2019년 인수가 약 1,450억 원의 6%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이번에 매각되는 것은 에이본의 글로벌 사업 전체가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를 담당하는 북미사업 법인이다. 에이본은 2016년 북미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했고, LG생활건강은 2019년 이 법인을 약 1,450억 원에 인수했다. 이후 회사 이름은 ‘더 에이본 컴퍼니’로 변경됐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 국제사업과 중남미 사업은 북미사업과 별도의 소유구조로 운영돼 왔다.
증권가에서는 적자를 내던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닥터그루트, 빌리프, CNP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LG생활건강 자체 브랜드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LG생활건강이 더 이상 에이본 없이도 북미사업을 꾸려갈 수 있게 됐다는 점에 무게를 둔 것이다.
더 에이본 컴퍼니는 지난해 매출 2,692억 원을 기록했지만 당기순손실 301억 원을 냈고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번 매각으로 LG생활건강의 연간 연결 매출은 약 2,600억 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에이본의 영업이익 기여도가 크지 않아 연결 영업이익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LG생활건강의 올해 2분기 북미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47.3% 증가한 2,058억 원을 기록해 처음으로 중국 매출을 넘어섰다. 북미 매출에서 자체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도 50%까지 올라섰다. 매출의 외형은 줄더라도 사업의 수익성과 방향성은 오히려 선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에이본의 매각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미 이 회사의 떠나는 방식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에이본은 한국에서 방문판매로 사업을 시작한 뒤 다단계판매로 전환했지만, 2012년 말 돌연 철수 방침을 발표하고 이듬해 영업을 종료했다. 당시 회사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판매원 수십여 명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국지사 앞에서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판매원들은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에이본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구축했다. 그러나 철수 발표와 함께 그들이 쌓아온 사업 기반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에이본은 직원들에게 근속기간에 따른 추가 급여를 지급하기로 했지만 사업자들에게는 뚜렷한 보상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세계 최대 직접판매기업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었다. 판매원을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던 기업이 정작 어려운 순간에는 그들을 헌신짝 버리듯 정리했다는 사실은 이후의 몰락과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에이본은 2011년까지 세계 직접판매기업 매출 1위를 지켰지만 이후 암웨이에 자리를 내줬다. 2013년에는 50년 넘게 사업했던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2014년에는 중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이를 은폐한 혐의로 미국 당국에 총 1억 3,50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해 에이본은 미국직접판매협회에서도 탈퇴했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에는 제품, 제조공장, 상표권 등만 있는 게 아니다. 회사의 이름을 믿고 고객을 만나온 판매원, 그리고 오랜 시간 쌓은 신뢰가 핵심 자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에이본에서 일했던 한국의 사업자들은 현재 글로벌 기업의 리더가 돼 승승장구하고 있거나 경영자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번 거래가 끝나면 북미의 더 에이본 컴퍼니는 올해 1월 에이본 인터내셔널을 인수한 글로벌 투자회사 리전트의 관계사 품에 들어간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사업과 미국·캐나다 사업이 다시 같은 투자그룹의 영향 아래 놓이는 셈이다.
LG생활건강은 에이본을 내려놓으면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적자 사업의 부담을 덜고 성장하는 K-뷰티·웰니스 브랜드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시장이 이번 결정을 호재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에이본은 2013년 한국을 떠나면서 판매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한때 세계 1위였던 기업도 영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줬다. 물론 기업이 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은 병가지상사와 같지만 떠나는 방식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에이본의 사례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됐다. 에이본이 철수하기 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다. 공통점은 판매원을 짐으로 여기는 순간 기업 역시 시장의 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에이본이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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