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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한 장터…백구두 영감님만 흥에 겨워

고령 5일장 ①

  • (2020-02-21 11:00)

내 인생의 첫 알바는 장터에서 이루어졌다. 5일마다 한 번씩 장이 서는 날이면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나타나 우리집 앞에 전을 펼치곤 했던 양은그릇 장수가 바로 내 첫 알바의 보스였다. 차종을 알 수 없는 트럭에 기기묘묘 쌓아올린 그릇들을 내리고 펼 때면 아무리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힘에 겨웠을 것이다.


처음부터 돈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어른이 힘들게 일하는 데 소닭 보듯 쳐다보고 있을 수 없어서 시작한 일이다. 좋은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날이 바로 장날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도와줄 때마다 돈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돈이라고 해봐야 50원에서 100원 정도였지만 장사가 잘 안 된 날에는 쓰다 달다 말도 없이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다음 장이 서는 곳을 향해 떠나가곤 했다. 당시에 양은냄비가 얼마였는지 내 노동의 정확한 가치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일자리와 보수가 아니라 장꾼으로서 장날을 보낼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고물 트럭이 뿜어내던 배기가스마저도 왜 그렇게 좋았는지….

고령군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에 속한다. 고령장이 열리는 날은 4일과 9일이다. 그러니까 14일과 19일, 24일과 29일에도 장이 선다. 고령장은 대구를 중심으로 봤을 때 서쪽 지역에서는 제일 큰 장이었다.

지금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에서부터 성주군 그리고 경상남도에 속하는 거창군, 합천군까지 고령군을 합쳐 모두 5개 군에서 장꾼들이 몰려들었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의 대부분의 이름난 장터가 그러하듯이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고령에서 승용차로 약 10여 분이면 대구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명맥이라도 잇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고령군의 특산물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흙 고령토가 가장 유명하다. 학창시절 밑줄을 그어가며 달달 외우기도 했던 바로 그 고령토이다. 최근에는 쌍림면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딸기가 유명하다.

우수를 맞이한 고령장은 점점 쇠락해가는 모든 전통들처럼 장집들 또한 이빠진 사기그릇처럼 군데군데 문을 닫고 있었다. 식전 댓바람에 탁배기 한 잔씩 걸친 노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터 어느 곳에도 옛날과 같은 흥성거림은 없었다. 심지어는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밑지고 파는 거’라며 우는 소리를 하는 장꾼의 엄살도 없었다.

이미 정찰제에 길이 들었는지 깎아 줄 생각도 하지 않을 뿐더러 사는 사람도 깎아 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기를 쓰고 덤벼들어 흥정을 벌이기에는 기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새댁보다는 한때 쌍림댁, 야로댁, 합천댁으로 불렸던 노장들이 주로 장터를 점령하고 있다.

짐작하기로는 아무래도 고령이니 만큼 딸기가 지천으로 깔려 있지 않을까 했는데 딸기를 파는 집은 장터 안에는 달랑 한 집뿐이다. 1970년대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눈 덮인 산속을 헤매고 헤매다 발견한 딸기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던 어머니를 살리는 신령스러운 약초 수준으로 미화되기도 했었는데 서서히 제 철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 만난 딸기 장수는 “옛날과 달라서 딸기를 시장에서 팔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말한다” 그의 말인 즉 “요새는 마카다(모두) 하우스 앞에다 판매장을 만들어 놓고 생산자가 직접 판매하기 때문에 굳이 시장에 딸기 사러 오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하소연한다. 하기는 집집마다 사촌오촌만 건너가도 딸기 농사 안 짓는 집이 없으니 딸기가 장에 나온들 팔릴 리가 만무다. 그렇지만 같은 경상북도의 영천장에는 한약재가 흥성하고, 의성에는 마늘장이 따로 설 정도인데 그래도 명색이 고령인데 딸기가 귀한 것은 좀 아쉽다.

공영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장골목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새로운 주인을 만나러 나온 강아지와 토끼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애견 상식을 총동원해서 생각해봐도 정확한 견종은 짐작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를 팔러 나온 사람은 죽어도 풍산개라고 우긴다.

주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인데 지나쳐 가다가 생각해봐도 풍산개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진돗개라고 할 수도 없고 삽사리는 완전 아니고 그냥 누렁이라고 부르기에는 색깔이 흰 편이고, 흰둥이라고 부르기에는 누런 색이 좀 과하다.


무슨 용도로 팔리는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닭들도 가득하다. 장닭도 있고 암탉도 있고 오골계에 물닭까지도 다 있다. 저 많은 닭이 오늘 하루에 다 팔리지는 않을 텐데 다시 철망에 넣어 되돌아가는 일도 큰일일 듯하다.


본격적인 장골목이 시작되는 초입에 1톤 트럭에 차려놓은 레코드점이 자리잡고 있다. 골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틀어놓은 스피커 앞에서는 아침부터 불콰한 백구두 어르신께서 뻗쳐오르는 신명을 어쩌지 못해 혼자서 부지런히 스텝을 밟고 계시다.

지긋이 감은 눈매나 네 박자로 감고 꺾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주위에는 취기가 모자란 것인지 숫기가 모자란 것인지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한 어르신들이 백구두 댄서를 지켜보고 서 있다.


 

권영오 기자mknews@m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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